
[추모사] ‘임정의 품 안에서’ 태어난 김자동 선생 가시다 / 이만열
이 글은 2022년 8월 23일 故김자동 선생께서 별세하셨다는 소식에 이만열 교수께서 쓰신 추모 글입니다.
‘임정의 품 안에서’ 태어난 김자동 선생 가시다.
지난 8월 23일 김자동(金滋東, 1928-2022) 선생이 돌아가셨다. 부음을 받고 그 날 저녁에 빈소를 찾아 문상하고 유족들을 위로했다. 평소 김 선생과 적지 않은 인연을 맺어 왔기에 불귀의 여로를 떠나신 선생에 대해 개인적인 고별의 글이라도 띄우려 했으나 지금까지 미뤄져 왔다. 후학의 게으름 때문이다.
김자동 선생을 가까이 접하게 된 것은 그가 이끄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임정기념사업회]에 관여하면서부터다. 처음에는 임정기념사업회의 결성에 참여하는 평범한 회원이었다. 2004년 9월에 발족한 임정기념사업회가 그 이듬해 2005년부터 젊은이들에게 독립운동 유적지를 현장답사시켜 독립정신을 함양시키는 프로그램을 진행시키게 되었다. 김자동 선생과 더욱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 것은 임정기념사업회가 추진하는 <독립정신 답사단>을 이끌게 되면서부터다. 이를 계기로 선생님과는 자주 뵙고 많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김자동 선생을 뵙기에 앞서 필자는 효창동에 있는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 뒤 협회가 운영하는 <백범강좌>라는 정기강좌의 책임을 맡아 인도하면서 생존한 독립운동가와 그 후예들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그 무렵 서영훈 선생을 통해서는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및 도산학회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독립운동사에서 백범 선생과 도산 선생이 공통으로 관여한 부분은 대한민국임시정부다. 도산 선생이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건립한 주역이었다면, 백범 선생은 그 무렵 상하이로 망명하여 그 뒤 임시정부 주석으로 임정을 이끌었다.
필자는 1990년대 무렵 도산과 백범, 이들 두 어른과 관련된 단체에 관여하면서 소개하는 글을 쓰기도 하고 강연도 했다. 그러면서 제헌헌법 전문에 명시된,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다는 귀절과 현행헌법 전문에 명시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계승”한다는 귀절에 근거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데에 힘썼다. 그러면서 가끔은 임시정부를 계승한 현행 대한민국이 임정기념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내 주장에 공감하는 분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당시 공감한 분들 중에는 임정 국무위원 겸 비서장을 역임한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선생도 있었다.
필자가 강조해온 임정기념관 건립은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백범기념관건립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그 무렵 광복회장이었던 윤경빈 선생의 역할이 컸다. 윤경빈 선생은 일제 말기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망명, 광복군에 합류한 분으로 한때 백범 선생의 경호대장을 역임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그는 또한 김대중 대통령과는 사돈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임시정부기념관 건립 문제는 백범김구선생기념관 건립으로 의견이 수렴되어 2002년 10월에 백범기념관이 건립되었다. 효창공원에 세워진 것은 백범 선생의 묘소가 근처에 있고 백범선생이 관여하여 이뤄진 임시정부요인 및 삼의사 묘역이 같이 있기 때문이다.
백범기념관이 건립된 후 독립운동가 및 그 후예들은 김자동 선생을 중심으로 임시정부기념관 건립의 필요성을 더 절감하고 그 준비작업의 일환으로 임정기념사업회를 발족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임시정부에 관여했던 독립운동가들과 임시정부사를 전공한 젊은 학자들도 참여했고 필자도 참여했다. 임정기념사업회 회장 김자동 선생은 그 이듬해부터 주로 젊은 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독립정신답사단’을 조직하고 매년 7월 중순에 독립운동 사적지를 탐방토록 했다. 2005년에 시작하여 코로나 유행 전 2019년까지 15회에 걸쳐 매년 60명 내외의 젊은이들이 임정기념사업회의 안내로 독립운동사적지를 답사, 선조들의 독립정신을 함양하는 데에 노력했다. 답사지역은 임정의 발자취와 항일독립운동 사적이 많은 중국 본토와 동북지역, 연해주지역과 일본까지 포함되었다.
김자동 회장 내외분은 초기에는 ‘독립운동답사단’과 답사를 같이하여 젊은이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때로는 자신의 어린 시절 중국에서 있었던 독립운동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필자는 ‘독립정신답사단’ 답사 15회 중에서 8회를 단장의 책임을 맡았는데, 그 때에도 김자동 회장내외분께서 동행했다. 건강이 여의치 않으실 때는 베이징이나 상하이까지 동행하시고 그곳에서 답사단 결성식에 참석, 첫날 강연이나 훈시를 맡으셨다. 동행하면서 들려준 독립운동의 내용 중에는 책을 통해서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내용들도 있었다. 한번은 이승만의 독립운동에 대한 질문이 있었는데 김 선생은 자기는 이승만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노라고 진솔하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필자는 다른 측면에서 김 선생을 알 기회가 있었다. 1981년 도미했을 때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사학과 선배인 변재현 형을 만나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전쟁의 기원 Origins of the Korean War> 1권(1980)이 간행되었다고 들었다. 그 책을 구해보려고 했으나 좀처럼 구하지 못했다. 1986년에 그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고 들었는데 번역자가 김자동으로 되어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김자동 선생을 알지 못했다. 그 뒤 임정기념사업회를 같이 하면서 그 책의 역자가 김자동 선생임을 알게 되었다. 김자동 선생은 브루스 커밍스의 저서뿐만 아니라 ‘레닌의 회상’ ‘모택동 전기’도 번역했다. 그가 임정의 품안에서 자라면서 영어공부를 상당한 수준으로 이미 끌어 올렸고 해방후 귀국하여 보성고와 서울대 법대에 재학하면서 더욱 정진, 6.25때는 미군 통역을 맡았고 조선일보 외신부 기자를 거쳐 1961년에는 민족일보 기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조선일보 기자시절 얄타회담의 내용을 번역, 발표하여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세계강대국의 의도를 밝혔는데 이는 그의 민족의식의 지향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1928년 상하이에서 독립운동가 김의한(金毅漢)․정정화(鄭靖和) 사이에서 태어난 김자동 선생은 1932년 윤봉길 의거 후에 임시정부가 파천의 길에 오르자 임정을 따라 자싱․항저우․난징․창시․광저우․류저우․치창을 거쳐 충칭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광복의 소식을 들었다. 그는 임정과 함께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담아 회고록 '임시정부의 품 안에서'(2014)와 '영원한 임시정부 소년'(2018)을 펴내 어린 소년의 눈으로 본 임정의 비사들을 풀어내기도 했다.
선생의 성품은 매우 부드러우면서도 올곧았다. 대화중에서도 과장되거나 진실을 떠난 내용은 부드럽게 바로잡아 주셨고, 온화함 못지 않게 ‘예스’와 ‘노’가 분명했다. 그의 사무실을 자주 방문한 필자는 그의 책상에는 항상 국내의 일간지와 중요한 잡지는 물론이고 ‘뉴욕 타임스’가 있었고 그 위에 돋보기가 얹혀 있었다. 그의 학구적인 태도는 매일 국내와 세계의 움직임에 늘 안테나를 달고 있었고 듣기가 어려워질 수록 그는 돋보기를 통해 눈으로 국내외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나이들 수록 그의 내면의 세계는 더 맑아지고 사회와 세계를 보는 안목은 더 예리, 원숙해갔던 것이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선생은 그의 부친이 납북되어 평양 애국열사능에 그 묘소가 있고[아래 사진 참조], 그의 모친은 대한민국 국립묘지에 있다. 분단은 독립운동에 헌신한 부부도 갈라놓았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의 조부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은 한말 개화파 관료로서 일제 강점 초기 수작(受爵)을 거절하지 못하다가 3.1운동 후 즉각 임정이 있는 상하이로 망명, 독립운동계의 원로로 추앙받았고 북로군정서의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조선민족대동단 총재로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를 바라보고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공간을 넓혀 주었다. 그러나 아직도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지 못한 채 그의 무덤이 상하이의 쑹칭링 능원에, 이제는 그 정확한 지점조차 알 수 없는 곳에 쓸쓸히 묻혀 있다.
이 짧은 글에서 김자동 선생을 자세히 거론할 수 없으나 그의 인품과 관련 두 가지만 언급하고 글을 맺겠다. 그는 한 때 사업가로서도 촉망받는 젊은이었으나 언론 등을 통해 비판적인 지식인으로서 올곧게 사는 길을 떠나지 않았다. 4.19후 조용수 선생에 의해 ‘민족일보’가 창간되었을 때 거기에 참여, 혼신의 힘을 기울였으나 쿠테타 세력에 의해 민족일보가 폐간되자 언론계를 떠났다. 그러나 10여년 전에 조용수 선생에 대한 신원(伸寃)운동이 일어났을 때 거기에 앞장 섰었다. 김자동 선생은 조용수 선생이 지향했던 민족주의 이념과 궤를 같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 적지 않은 분들이 조상의 독립운동 공적을 내세워 처세의 방편으로 삼으려 하고 있으나 김자동 선생은 그 부모님의 독립운동 공적을 삶의 기회로 활용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후학으로서 그 점을 늘 눈여겨 보았다. 적지 않은 독립운동 후예들이 조상의 은덕에 힘입어 청탁 가리지 않고 출세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김자동 선생은 그 쉬운 길을 마다하면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그의 고귀한 인품을 지켜 주었다. 나는 그 점을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
[사진은 김자동 선생 내외가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능에 안치된 그의 부친 김의한 선생의 묘역을 방문했을 때 촬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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