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4일의 삼둔자 전투에서 시작되었다. 삼둔자는 두만강 중류 북쪽 대안의 간평이라는 마을 이름이었다. 옛날 홍범도 장군이 이 삼둔자 마을에 와서 두만강 건너 고국 산천을 바라보고 "아! 내가 실로 몇 년만에 고국산천을 보는 것이냐" 하면서 눈물지었다는 곳이다.
바로 이 곳에서 1920년 6월 4일, 30명 가량 되는 우리 독립군이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강양 마을을 기습하였다. 강양에는 일본군 헌병순찰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불의의 습격을 받은 일본군은 강을 건너 후퇴한 독립군을 따라 삼둔자 마을을 공격하였다. 이에 독립군이 일제사격을 가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이것이 소위 삼둔자 전투라는 것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흔히 있는 전투였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접한 일본군 대장이 화가 나서 대대병력으로 독립군을 추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첫째 봉오동의 독립군 기지를 소탕하라. 둘째 고려령 서쪽 2킬로 미터 지점을 향해 전진하라"
일본군 대장은 이렇게 고함을 쳤다. 고려령은 두만강 가에 있는 도문시 뒷 산인데 매우 아름다운 산이다. 왜 여기 중국 땅에 고려령이 있는지 그 역사를 추적하면 두만강 건너가 우리 땅이었기 때문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고려령을 넘으면 유명한 봉오골이 나온다. 봉오골은 좁은 어구를 들어서면 넓은 분지가 나온다. 이 분지에 상동, 중동, 하동이라는 세 동포 마을이 있었고 여기에 홍범도의 독립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홍범도는 대한제국의 사병으로 있다가 해산과 동시에 의병을 일으켜 안중근 의사의 노령 연해주 의병과 국내진공작전을 벌이는 등 역전의 용사였다. 그는 먼저 봉오골 주민을 모두 피신시켰다. 그리고 적을 골짜기 깊숙이 유인하였다.
홍범도가 먼저 신호탄을 쏘자 독립군의 일제사격이 시작되고 일본군은 피를 흘리면서 쓰러졌다. 불과 4시간 동안의 전투로 일본군 1백57명이 사살되고 3백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것을 봉오동 대첩이라 하며 "청산리 독립전쟁의 개시"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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