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말기 교육가·의사(義士). 황해남도 해주 (海州) 출생.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수학하고 승마·궁술·사격술을 익혀 문무(文武)를 겸했다. 1895년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多默] 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산둥[山東]을 거쳐 상해[上海]로 갔다. 1906년 석탄 상점을 정리한 뒤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세웠고, 이어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세웠다. 1907년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이 되어 애국운동을 펴다가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북간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1908년 대한의군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군사령관 직책을 맡아 엄인섭(嚴仁燮)과 함께 의병군을 이끌고 경흥(慶興)까지 쳐들어갔으나 일본군에 패배하여 탈출한 뒤 노브키에프스크로 가서 국민회·일심회(一心會) 등을 조직하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여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훈련을 담당하였다. 1909년 3월 노브키에프스크에서 김기룡(金起龍)·엄인섭·황병길(黃丙吉) 등 12명이 모여 단지회(斷指會)를 조직, 안중근·엄인섭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김태훈(金泰勳)은▲하얼빈에 위치한 안중근 의사 기념비 이완용(李完用)을 암살 제거하기로 단지의 피로써 맹세하였다. 같은 해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 V.N.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하여 만주(滿洲) 하얼빈[哈爾濱]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살해를 결의하였다. 우덕순(禹德淳)·조도선(曺道先)·유동하(劉東夏)와 저격 실행책을 세우고 하얼빈역에 잠입, 코코프체프와 열차회담을 마치고 러시아 군대를 사열하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러시아 검찰관 예비심문에서 거사 동기를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개인자격이 아닌 대한의군사령관으로서 처형하였다>고 밝혔다.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 지방법원에서 여섯 차례 재판을 받은 뒤 10년 3월 뤼순[旅順]감옥에서 순국하였다. 많은 유필(遺筆)을 남겼으며 재감중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다. 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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