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약연기념비김약연기념비는 1942년 건립되어 문화혁명 때 일부 파손되었다가 최근에 복원되었다. 규암 김약연은 함북 종성사람으로 1907년 간도 화룡현 지신사 명동촌에서 연변교민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09년에는 간도 간민회를 이동춘과 함께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에는 명동서숙을 설립하여 숙감을 역임하였으며, 1910년에는 명동중학으로 발전시켜 교장으로 재직하였다. 1912년 이동휘가 명동으로 망명해 오자 북간도국민회를 창설, 회장직을 역임하면서 독립운동의 선봉에 나섰다. 1919년에는 무오독립선언서 발표에 가담하였으며, 동년에는 조선독립기성총회를 조직하여 의사부원으로 활동하였다. 동년 3월에는 노령 니코리스크에서 개최된 대한독립선언과 파리강화회의에 대비한 전로한족중앙총회에 북간도 대표로 참석하여 일제에 대한 강력한 항의문을 발표하였다. 1923년 2월 26일에는 24처 지방대표가 모인 가운데 전간도주민대회를 개최하여 간도에 거주하는 30만 한국인의 생명과 재산보호를 위해 자치권 확보에 노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 내용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은 일제는 그를 한국독립운동의 수령으로 또는 100만 동포의 대표자로 부르기도 하였다. 그는 만년에 캐나다 선교회에서 용정에 설립한 은진중학교의 이사장에 선출되어 활동하다 1942년 10월 29일 용정시 자택에서 ‘내 모든 행동이 곧 나의 유언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75세로 별세한 항일독립운동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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