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는 여천(汝千), 별명은 범도(範道)이다. 1868년 평안북도 자성[慈城:일설에는 평양·양덕(陽德)]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갑산(甲山)에 이사, 수렵과 광산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907년 전국적인 의병봉기에 자극을 받고 있던 중 이 해 9월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고, 이 법에 의하여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려 하자, 11월 차도선(車道善)·태양욱(太陽郁)·송상봉(宋相鳳)·허근(許瑾)과 함께 산포대(山砲隊)를 조직, 삼수(三水)·갑산지방 포수들의 총포를 회수하러 온 일본군을 북청(北靑)·후치령(厚峙嶺)을 중심으로 갑산·삼수·혜산(惠山)·풍산(豊山)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여 격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그는 9시간의 전투 끝에 적을 전멸시켰는데 한때 갑산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 점령되자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에 전력, 다음 해 부하 박영신(朴永信)으로 하여금 함북 경원(慶源)의 수비대를 습격하게 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19년 본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독립군의 총사령이 되어 약 400명의 독립군으로 1개 부대를 편성, 국내에 잠입, 갑산·혜산·자성 등의 일본군을 급습하여 전과를 거두었는데, 특히 만포진(滿浦鎭) 전투에서 70여 명을 사살하였다. 1920년 6월 반격전으로 나온 일본군이 제19사단의 병력과 남양(南陽) 수비대로 부대를 편성하여 독립군 본거지인 봉오동(鳳梧洞)을 공격해 오자, 700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 3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120여 명을 사살, 그때까지의 독립군이 올린 전과 중 최대의 승전을 기록하였으며, 그해 9월 청산리(靑山里) 전투에서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제1연대장으로 참가하였다.
그 후 독립운동단체가 흑룡강의 국경지대에 집결하자 항일단체들의 통합을 주선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부총재가 되었으며, 1921년 러시아령(領) 흑하자유시(黑河自由市)로 이동하여 스랍스케 부근에 주둔, 레닌 정부의 협조를 얻어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군의 실력양성에 힘쓰던 중 1921년 6월 소련 당국의 한국독립군에 대한 무장해제령으로 빚어진 흑하사변(黑河事變)이 발생하자 소련군과 충돌하여 많은 희생자를 낸 채 북만주로 탈출하였다. 그 후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1943년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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