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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백년 전 그의 ‘동양평화론’이 더욱 절실한 까닭은?
글쓴이 코리아
날 짜
07-09-09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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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항일투쟁 전적지 답사기 2

백년 전 그의 ‘동양평화론’이 더욱 절실한 까닭은?

 - 안중근 열사 편 -


“일본이 수많은 중국인을 죽이고 있을 때 우린 당하고만 있었는데 안중근이 우리 한을 풀어 주었다. 대단한 사람이다.”
하얼빈역 의거 현장에서 우리 답사단을 보고 이렇게 말을 건넨 사람은 다름 아닌 역구내 50대 중국인 청소원이었다.
엊그제 지켜본 사람처럼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이다. 내 옆에 가이드가 통역을 해주지 않았다면 ‘안중근’ 이라는 단어만 비슷하게 알아듣고 지나쳤을 것이다.
일백년 전 일이지만 지금도 중국인들에게 가슴속에 뜨거운 메시지를 남긴 안중근 의사를 이렇게 현장에서 만났다.

#하얼빈에서 만난 안중근의 숨결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하얼빈역, 재판받은 여순 일본법정, 순국한 여순 감옥 등에서 그의 발자취와 숨결을 느껴갔다. 또한 “을사늑약으로 한국의 주권을 빼앗은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대한의군중장 자격으로 처형하였다”고 당당히 밝힌 안 의사에 대해 외워서 시험 치르듯이 피상적으로 알고 있음도 인정해야 했다.
안 의사의 진면목은 체포된 직후부터 순국 할 때까지 5개월 동안 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린 일관된 사상과 행동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안 의사를 알면 알수록 독립투사 일뿐 만아니라 남다른 철학을 가진 사상가였음을 상기 시킨다.
이토 히로부미를 포살한 안중근은 이토를 동양의 평화를 저해는 원흉으로 지적하고, 근거로 15개조를 제시했다.
1.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한국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3.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4.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5.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철도·광산·산림·천택 강제로 빼앗은 죄 7.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군대를 해산시킨 죄 9.교육을 방해한 죄 10.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한국인은 일본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한국이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일본왕을 속인 죄 14.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15.일본왕의 아버지 태왕을 죽인 죄 이처럼 이토를 처단한 것은 개인의 원한 관계가 아닌 동양평화를 깨뜨린 중죄를 대한제국 군인의 자격으로 응징한 것이므로 전쟁포로 대우를 요구했다.

#시대를 앞서간 혜안 ]

이는 약자의 자기보호 주장이 아니라 1908년 3백명의 의병을 지휘하며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생포한 일군포로들을 만국공법에 의해 풀어준 군인정신 소유자이기에 당연한 입장이었다.
그의 대의명분인 ‘동양평화론’은 참으로 시대를 앞서간 혜안이 아닐 수 없다.
동경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 원장이 발굴한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동양평화를 위해 한·중·일 삼국이 손을 잡고 서구열강의 침략을 막아야 하며 구체적인 방안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삼국의 백성들이 1원씩 모아 공동의 화폐를 만들고 은행을 설립해 삼국의 주요 지역에 은행지점과 평화회의 지부를 만들자.
이를 바탕으로 여순에 영세중립지를 만들고 삼국 평화군을 양성해 영구평화를 구축하자”고 제안했다.

#백년이 흘러도 빛나는 정신

이는 지금의 유럽연합(EU)이 만든 유로화가 백년 전 지구 반대편 동양에서도 제창된 참으로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의 평화안 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일본은 안 의사의 충고를 무시하고 군국주의 야욕을 버리지 못한 채 결국 패망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그 후로 백년이 흐른 21세기가 되었지만 한반도를 비롯한 동양 삼국은 정치·경제·군사 등 첨예한 각 분야에서 평화를 위한 선의의 경쟁보다는 이전투구 양상으로 다시 무한 경쟁에 들어서고 있다.
그리고 동양평화를 목숨과 바꾼 안 의사의 유해 발굴은 일본의 진실 은폐와 중국의 비협조, 남북한의 엇박자로 지금까지 이국땅속 어디에선가 편히 눕지도 못하고 나무통속(사진1)에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안 의사 일대기

“내가 죽은 뒤에 우리 국권(國權)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다오.”


안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이고, 아명은 응칠(應七)이며,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도마)이다. 1894년 갑오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부친을 따라 총을 들고 도내에서 동학혁명을 빙자하고 민간에 폐를 끼치는 무리들의 토벌에 나서기도 했다.
17세 되던 1895년에는 부친을 따라 천주교(天主敎)에 입교해 프랑스인 홍신부와 함께 선교에 나서기도 했다.
27세 되던 광무 9년(1905)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는 중국 상해로 건너가 국권회복의 길을 강구하였으며 부친상을 당하고 돌아와서는 집을 평안도의 진남포(鎭南浦)로 옮기고 재산을 기울여 삼흥(三興)학교, 돈의(敦義)학교를 세워 인재교육에 힘썼다.
그러나 광무황제의 폐위, 군대의 해산 등 국권이 식민지상태에 이르자 다시 해외로 나가 이범윤(李範允) 김두성(金斗星)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융희 2년(1908)에는 의군장이 되어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함경북도로 진입하여 경흥(慶興) 회령(會寧) 등지에서 대일항전을 전개했다.
그 후 다시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톡, 연추(煙秋) 등지를 왕래하면서 동지들을 만나 구국의 길을 강구하고 1909년 봄에는 김기열(金基烈) 백낙길(白樂吉) 우덕순(禹德淳) 등 동지들과 함께 손가락을 잘라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하며 일사보국을 맹세하고 기회를 기다리며 준비했다.
09년 9월 블라디보스톡에서 일제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등박문)가 하얼빈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이토를 처단하기로 하였다.
일찍부터 뜻을 같이하던 우덕순(禹德淳)을 만나 함께 거사하기로 한 다음 권총을 한 개씩 준비해 하얼빈 방면으로 향해서 가는 도중 다시 유동하(劉東夏)와 조도선(曺道先) 두 사람을 만나 함께 참가하게 되었으며 거사장소를 남청(南淸) 철도의 교환점인 채가구(蔡家溝)와 하얼빈의 두 곳으로 정하고 우덕순은 채가구에서, 그는 하얼빈에서 기다리다가 엄습하기로 했다.
10월 26일(음력 9월 13일) 9시경 이토가 기차에서 내려 러시아의 재정대신 코코흐체프와 함께 러시아 군인들의 경례를 받으며 각국 영사들이 있는 곳을 향하여 천천히 걸어가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그는 권총을 빼들고 이토를 향하여 총을 쏘아 4발을 모두 명중시켰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본국 동포들의 그 큰 기쁨이야 이루 말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또한 청·일전쟁 이래로 일본제국주의의 위협에 떨고 있던 중국의 국민들에게도 큰 기쁨의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09년 11월 그는 러시아 헌병대에서 여순(旅順)에 있는 일본 감옥으로 이송되어 심문과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일제 관리들은 위세를 부리며 중죄인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저들의 부당한 침략행위를 통렬히 공박하여 시정을 요구하였으며 일제 관리 또한 그의 의로운 기개에 감복하여 특별히 우대하기도 했다.
그리고 공판정에서는 대한의군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하여 적 이토를 죽였으니 이런 법정에서 신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하여 재판을 거부하기도 하였으며 재판장의 신문에 대하여 이토는 누차에 걸쳐 대한(大韓)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양국간의 조약과 서명을 무시하고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위협하여 독립을 빼앗으니 이것은 세계 인도의 적이요, 우리 대한 만대의 원수인즉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항변하여 일제를 당황하게 했다.
그는 또 이토가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불법무도한 일을 제 마음대로 하여 동양평화를 교란한 사실 등 15개조의 죄상을 들어 서면으로 저들에게 제출하여 다시금 이토를 논죄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토의 처단은 목적의 일부를 달성한 것이요, 정작 큰 소원은 조국의 완전 독립과 동양평화의 정착임을 주장했다.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의 공판을 받았던 그는 14일 사형을 선고받고 3월 26일 순국하였는데 순국 직전에 아우 정근(定根) 공근(恭根)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하였다고 한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國權)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을 세우고 업(業)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항일역사도서관 관장 정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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